아비정전(阿飛正傳) 다시보기 (명작, 왕가위, 감성)
왕가위 감독의 1990년 작품 ‘아비정전’은 단순한 멜로 영화가 아닙니다. 고독, 정체성, 시간에 대한 깊은 철학을 담은 이 작품은 그의 세계관을 처음 선보인 결정적 지점입니다. 장국영의 전설적 연기와 더불어 시각적 감성, 대사, 음악까지 모든 요소가 어우러진 ‘아비정전’은 지금 다시 보아도 여전히 매혹적인 작품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아비정전의 줄거리, 핵심 해석, 감성적 요소들을 다시 짚어보며 그 깊이를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아비정전 줄거리 요약과 구조
‘아비정전’은 장국영이 연기한 유디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이 교차하는 이야기입니다. 유디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상처로 인해 누구와도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남자입니다. 그는 숙희(장만옥)와 잠깐의 로맨스를 나누지만, 결국 그녀를 떠나고 말죠. 그 후 유디는 또 다른 여성 루루(류가령)와 관계를 맺지만, 이마저도 소유욕과 사랑의 경계를 넘나드는 갈등으로 무너집니다. 영화 후반에는 그의 양어머니를 찾기 위해 필리핀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한 경찰(유덕화)과 마주치며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줄거리는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왕가위 감독은 시간의 흐름과 감정의 반복을 통해 서사를 구조적으로 엮습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나는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에 그녀를 사랑하게 됐다”는 대사는 영화의 시간적 프레임을 상징하며, ‘정해진 순간’에 대한 집착을 표현합니다.
인물과 감정을 통해 본 해석
유디는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하고, 관계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보다, 자신의 고독과 과거의 상처를 덮기 위한 수단으로 사랑을 사용합니다. 숙희와의 관계에서도 그는 그녀를 대하지만, 책임지려 하진 않습니다. 숙희는 전형적인 희생적인 사랑의 화신입니다. 그녀는 유디를 향한 사랑을 감내하면서도 끝내 포기하게 됩니다. 반면 루루는 감정적 갈등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인물로, 유디의 또 다른 거울 같은 존재입니다. 그녀와 유디 사이에는 사랑이라기보단 서로의 상처를 부딪히는 충돌이 많습니다. 영화는 인물들 간의 감정선보다 그 감정이 만들어지는 ‘내면의 풍경’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대사보다는 침묵, 음악, 시선, 공간 활용을 통해 그들의 심리를 표현합니다. 특히 장국영의 눈빛과 고독한 표정은 유디라는 인물의 심연을 보여주는 데 결정적입니다.
감성 영화의 결정판, 왕가위 스타일의 미학
‘아비정전’은 왕가위 감독의 스타일을 가장 순수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느릿한 슬로모션, 어두운 조명, 흐릿한 배경, 그리고 반복되는 음악 등은 단순한 장면 구성 이상의 감성적 울림을 줍니다. 특히 장국영이 공중전화 부스를 나오는 장면, 벽시계를 바라보는 장면 등은 시간이 멈춘 듯한 인상을 남깁니다. 왕가위는 ‘공간’을 감정의 메타포로 사용합니다. 좁은 방, 비 오는 거리, 어두운 계단 등은 인물들의 고립감과 내면을 상징하며,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줍니다. 또한, ‘아비정전’은 왕가위 세계관의 시작점으로서 이후 ‘중경삼림’, ‘해피투게더’, ‘화양연화’와 연결됩니다. 특히 엔딩에서 등장하는 유덕화는 후속작과의 세계관 연결을 암시하며 관객에게 더 큰 궁금증을 남깁니다. 감성적인 OST 역시 영화의 정서를 강화합니다. 자주 등장하는 라틴 음악은 홍콩이라는 도시의 이국적인 분위기와 어우러지며, 장국영의 무표정한 얼굴에 묘한 대비를 이룹니다. ‘아비정전’은 단순한 멜로가 아닌, 인간의 내면과 정체성, 시간에 대한 철학을 담은 작품입니다. 지금 다시 본다면, 그 감정의 결이 더욱 깊고 풍성하게 느껴질 것입니다.